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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8-07 11:44
은둔자의 꿈과 희망: 김두수와의 인터뷰(2-2)
 글쓴이 : 허브
조회 : 1,974  

신현준 homey@orgio.net | contents planner

일시: 2002년 4월 5일
장소: 마포 한강변 [weiv] 안가(安家)
인터뷰어: 신현준


'한국적' 유토피아를 찾는 구도자?

문: 하덕규씨 이야기가 나온 김에 김두수씨 음악이 하덕규씨 음악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실은 나의 개인적 견해다). 두 분의 음악 모두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는 구도자 같은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단지 다른 점은 김두수씨의 음악에는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서가 있는 점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좀 자세히 여쭤 보고 싶군요.
답: 한국 사람이니까 된장찌개, 김치찌개 먹고 한국적 토양 위에서 성장했으니까 당연한 것 아닐까요(웃음). 하지만 한국 음률이라는 게, 개념이 모호하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한 음률이 있지 않습니까. 꼭 집착하는 것은 아니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음률 같은 게 있습니다. 들으면서 편한 음률. 그걸 동양적이라고 해야 할지 한국적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점은 생각을 하고 작곡을 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들어주시면 반갑죠.

문: 혹시 무슨 '선(禪) 사상'이나 신비주의 사상 같은 것에 심취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답: 하하. 아닙니다. 그것도 그렇고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 음반 제작하시는 어떤 분이 제 음반을 듣고 '김두수는 분명 대마초 꾼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문: 대마초도 안 하는데 그런 음악이 나오는 건 다른 뭐가 있는 것 아닐까 해서 '사상'을 물어본 것입니다. 이번에도 "추상"이나 "Romantic Horizon" 같은 음악은 좀 난해하고 신비주의적 색채가 있는 것 같습니다. 2집에서 "청개구리 수희"나 B면의 수록곡들도 그랬던 것 같고...

김두수 - 추상 ([자유혼](2002) 수록) 
김두수 - 내 영혼은 그저 길에 핀 꽃이려니 ([김두수 2집](1986) 수록) 

답: 무슨 말인지? (그리고 "청개구리 수희"를 재생했다). 이게 그런 느낌입니까. 이건 이병우가 기타 친 것 같은데... 아, 이건 오베이션 기타를 이병우 기타를 빌려서 내가 친 겁니다. 기타가 없어서 빌려 달라고 했더니 빌려 줘서 제가 쳤죠. 근데 이 곡은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자취하던 방 맞은 편에 젊은 부부랑 딸 하나 세 식구의 가족이 들어온 일이 있었습니다. 고대 뒤쪽이었는데 두 분이 치킨집을 했었습니다. 밤에는 애를 데려갈 수 없으니까 머리를 홀랑 깎여 놓더라구요. 그게 안스러워서 만든 노래입니다. 걔 이름이 수희였어요. 말 무지하게 안 들었어요 청개구리 같다고 맨날 부모한테 얻어맞고. 그래서 여자애를 중머리를 해 놓았어요. 귀엽게 생겼는데... 걔도 많이 컸겠네요.

김두수 - 청개구리 수희 ([김두수 2집](1988) 수록) 

문: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한국적인 정서'에 대해 목적의식을 가진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포크'가 '민속음악'이라고 한다면 이건 참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음악 하는 젊은 친구들은 '한국적 정서'라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힘든 현상입니다.
답: 맞습니다. "망부석"을 부른 김태곤씨나 정태춘, 이성원, 곽성삼씨 등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면 후배들도 좋을 텐데 후배들도 너무 기댈 데가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으니까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선배들이 정립해 놓은 것도 없고 괜히 야단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겠죠. 선배들 탓이죠. 저를 포함해서. 그러니까 모방 일색으로 가니까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김두수 - 여로 ([김두수 1집](1986) 수록) 
김두수 - 해당화 ([자유혼](2002) 수록) 

문: 그런데 한국인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이 다르고...
답: 아쉽지만 그게 대세라면 할 수 없는 거죠. 소위 글로벌 시대에... 하지만 LP가 CD로 바뀌는 걸 보면 작아지고 편리해지고 좋은 것도 있지만, 하나 편리해지면 하나가 사라지고 아쉬워요. 아쉽죠. 예전 LP를 받아 들었을 때의 기분하고 CD를 요렇게 받아드는 기분과는 참 다르죠. 손으로 직접 닦고 올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CD를 듣다가 LP를 듣는 건 귀찮은가 봐요. 여기도 LP는 별로 안 보이고 CD 세상이네요(웃음).

그때를 아십니까?

문: 그러면 옛날 이야기를 해 볼까요? 성장기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고향이 대구라고 하셨나요?
답: 태생만 대구이고, 고향이라고 물으면 대구라고 얘기해야 되지만 대구에서 낳아서 마산에도 좀 살다가 다시 대구로 가서 성장했습니다. 대학교는 경북대 다니다가 그만 두고 1980년대 초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군대는 시력이 나빠서 가지 않았고...

문: 기타는 언제부터 어떻게 치기 시작하신 건지요? '독학'이셨나요?
답: 글쎄 어떻게 쳤더라...(웃음). 아, 선생이나 스승을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다면 중학교 때 누나 친구한테 잠깐 C - Am - Dm - G7 뭐 이런 거 배운 적은 있죠. 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친 거죠(참고로 1집의 마지막 트랙은 저 코드 진행으로 이루어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문: 대학교 다닐 때 음악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답: 1986년에 첫 음반을 냈으니까 그전까지 대학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 같은 걸 했죠. 그때 무교동, 명동 등에서... 그때는 살롱이라고 불렀는데, 그 중 김정호씨가 했던 운영했던 [꽃잎]이라는 곳이 있었죠. 거기서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PJ 살롱]이나 [쉘부르] 같은 곳에서도 노래를 불렀고...

문: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들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답: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음악에 재능 있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음악의 길을 가지 않게 되더라구요,. 장래가 잘 보이지 않으니까. 음악 잘 하는 사람들이 다른 것에도 재능이 많으니까 조금 더 장래가 밝은 쪽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을 한다고 하면 장래가 정말 불투명하죠. 첫 장애물이 생계라는 거니까 많이들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죠. 하지만 음악을 한다는 것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좋은 감상자가 되는 것도 하나의 길이라고 봅니다. 모든 사람이 음악을 만들 필요는 없죠. 길이 그쪽인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은 하지 마라고 그래도 음악을 하게 됩니다. 다른 길을 갈 사람은 아무리 붙잡아도 다른 길을 가게 되고...

문: 김두수씨의 경우 음악을 해서 좋은 점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 음악을 해서 좋은 점은 표현수단을 하나... 그러니까 출구라고 그래야 할까요. 표현의 출구를 하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만 했다면 사라져 버리거나 혼자만 알고 끝내버리니까 표현의 출구를 하나 가진다는 건 좋은 점이 있죠.

문: 무례한 질문이지만 음악을 해서 나쁘다거나 후회스러운 점은 혹시 있었는지요?
답: 그런 쪽으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표라든가 그런 게 있으면 좋은데, 거기까지는 아직 발전하지 않고 있고, 그냥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거죠.

문: 그래도 자신의 음악을 어떤 사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은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바램'은 있죠. 마음이 어지러울 때 마음의 위로나 평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음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자 바램이 있습니다. 그게 본래 음악이 태어난 이유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하다못해 동요라도 부르면 어지럽던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습니까. 그게 음악의 좋은 점이죠. 이번 음반을 듣고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좀 거칠었던 것도 편안하게 만들었죠.

그리고 자유롭게...

이후의 인터뷰는 정말 두서없이 되어 버렸고 문답이 아니라 대화 형식이 되어 버렸다. 나로서는 좋은 경험이었지만 독자들로서는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옮겨 본다. 이때 틀어놓은 CD 플레이어에서 그의 대표곡(?)이자 이번 앨범에 재수록된 "보헤미안"이 흘러나왔고 갑자기 기타 연주에서 닐 영의 영향이 보이는 것 같아서 앞서 모호하게만 말했던 점에 대해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김두수 - 보헤미안([김두수 3집](1991) 수록) 
김두수 - 보헤미안([자유혼](2002) 수록) 

문: 혹시 닐 영 좋아하셨나요?
답: 닐 영 좋아했죠. 대단한 사람이죠. 음악이 설득력이 있죠.

문: 그런 분은 요즘도 활동하고 있고 최근에 신보도 나왔습니다. 젊은 음악 하는 친구들도 닐 영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답: 아,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너무 조로하죠. 우리는 토양이, 그런 음악인을 키울 토양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문: 앞으로는 나아질까요?
답: 나아지겠죠. 나아져야 되고...

문: 조동진씨를 한번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자기는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이 없다.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답: 하하. 그나저나 한번 찾아뵈어야 되는데...

문: 조동진씨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건 뭐 누굴 지지한다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는 사전검열 같은 것도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정치에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답: 그때는 슬픈 노래도 못 했죠. 항상 희망적으로, 사랑도 희망적으로 끝나야 했고, 슬픈 노래를 부르면 비탄조라고 해서 빨간 줄을 그었죠. 그때 비하면 지금은 좋아진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해서는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하는 것은 없네요. 잘 모르니까 우선... 분명히 제 생활에 영향은 오는데, 저 같은 일반 서민한테 영향은 오는데 관심이 잘 가지 않습니다.

문: 정말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생계는 어떻게 꾸리시는지요? 저도 생계에 허덕이는 사람이라서 여쭤보는 겁니다.
답: 가난하게 사는 수밖에 더 있나요?(웃음), 정당한 수입이라는 건 인세나 계약금을 받는 것일 텐데 아직은 뚜렷한 성과가 있는 건 아니니까. 과거 음반에 대해서도 받을라고 하면 조금 있을 텐데 그쪽으로는 찾아가 보질 않으니까 받은 게 없죠. 사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쪽으로도 관심이 잘 가지 않습니다. 후배들이 부당한 관행을 당해서 '선배들은 뭐 했느냐'고 말해도 욕 들을만 하죠.

문: 이번 음반이 잘 되셔야겠네요. 노래방에 들어가는 곡도 생기고...(웃음) 사실 요즘은 음반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음반은 홍보 수단이고 주 수입원은 라디오나 노래방이 된 것 같습니다.
답: 한국에서 음반은 타이틀곡 몇 곡만 들을 만 하니까 음반 사라는 것이 아니죠. 음반이 스타를 만드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고, 음악이 아니라 자기 장사를 하는 거죠.

문: 그런 식은 아니라곤 해도 홍보를 하셔야 할 텐데...
답: TV보다는 라디오쪽으로 알아 보려고 합니다. 라디오의 경우 예전보다는 분위기가 나아진 것 같습니다. 그때는 라디오가 굉장히 파워가 강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매체가 다원화되었으니까 어떤 출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문: 개인적 바램으로는 모습을 직접 뵐 수 있는 공연 같은 걸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이 허락하시는지는 모르지만요. 공연 계획은 어떻게 잡고 계신지요?
답: 공연은 정말 잘 해야 되죠. 공연은 잘 못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죠. 그러니까 '감상'이 되는 공연을 해야죠. 예전처럼 기타 하나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녹음을 하면서 어려웠다고 말했듯이 세션 연주자들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앨범에 참가한 분들이 하면 제일 좋은데, 한 프로에 50만원은 드려야 하는 비싼 분들이고(웃음), 세션맨들은 바쁜 분들이라서 연습비도 드려야 하는데... 어쨌든 공연을 제대로 하려면 저변이 더 생겨야겠죠. 홍보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그 뒤에도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말문을 잘 열지 않고 모호하게만 표현했던 그는 그 뒤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도 했다. 나 역시 머뭇거리지 않고 자유롭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졌다. 그와 매니저에게는 그날 동숭동에서 세션 연주자들을 만날 약속이 있었는데 "조금 늦게 가겠다"고 연락한 뒤 나와 동석을 계속해서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녹취를 하지 않아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이야기는 기억이 난다. 학교 다닐 때 교사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당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은 뒤라서 "스위스"라고 서슴없이 말했다가 마치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맞듯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경험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고 했다. '한국적 정서'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그도 어린 시절은 서양에 대한 동경으로 출발했던 것일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두들겨 패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교사의 심뽀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병원에 입원하던 시절에는 동료 음악인 이성원이 찾아와 병상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그 경험은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라는 산울림의 가사 같은 것이었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인터뷰 내내 "나에게는 음악적 동료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故) 김광석이나 이원재처럼 '지금 다시 들어보니까 한국적'인 음악인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고, 특히 김광석은 죽기 몇 일전 서울에 오랜만에 나왔다가 신촌에서 우연히 부딪혔을 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 외에도 한국의 음악문화나 문화 일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은둔을 오래 한 사람이라서 정보에는 어두웠지만 판단은 그리 무디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에서는 하루에 볼 일을 두 개 이상 처리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서 나는 대도시의 광기의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불현듯 나도 언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때 할 말은 준비해 두었다. 무리들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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