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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8-03 10:22
LP의 향수
 글쓴이 : 허브
조회 : 1,863  


         
책장에 묵혀둔 80년대 시집을 어쩌다 뽑아 펴보면 묵은 종이냄새와 함께 글자들부터 정겹다.
글자의 선(線)에서 미세하게 잉크가 번져난 자국들이 왠지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활자에 눌린 요철(凹凸) 자국에선 시심(詩心)이 만져질 듯하다.
활자를 일일이 손으로 뽑아 판을 짜고 거기에 잉크를 묻혀 찍는 활판(活版) 인쇄의 멋이고 맛이다.
너무 매끈하고 날씬해서 얌체 같은 요즘 컴퓨터 자체(字體)들에선 그 아련한 너그러움을 맛볼 수 없다.


컴퓨터 모니터에 뜬 서류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려 결재하는 ‘전자 서명’ 시대라 해도
굵은 만년필로 사인하는 이른바 ‘젖은 서명(wet signature)’의 묵직한 신뢰와 매력은 당해낼 수 없다.
그래서 서구엔 잉크와 종이를 고수하자는 ‘잉키스트(Inkist)’들이 등장할 정도다.
디지털시대가 깊어갈수록 아날로그의 인간적 향취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가운데 지름 30㎝짜리 LP(long playing) 레코드판이 있다.



‘좀 듣는다’는 LP 애호가들은 “CD에서 맛볼 수 없는 음감이 있다”고 말한다.
CD는 아날로그 신호인 음악을 디지털로 바꾸는 과정에서
1초에 4만4000번으로 소리를 끊어 신호화하기 때문에 부드러운 맛이 떨어진다고 한다.
CD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비가청(非可聽) 주파수 대역의 소리를 지워버리지만,
LP에선 이 소리가 일반 소리와 섞여 변조(變調)를 일으키면서 음감을 높인다는 주장도 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LP에선 은은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30대를 넘긴 세대 누구에게나 추억 하나쯤 걸려있을 LP지만,
MP3 휴대폰까지 나오는 세상에선 어쩔 수 없는 퇴물 신세다.
‘레코드 바늘’이라고 했던 카트리지 하나 사려고 헤매던 황학동 벼룩시장도 사라져 버렸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LP 제작자 홍창규씨가 고집스럽게 공장을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어제 신문에 실렸다.
음악박물관 같은 데서 가끔 전화를 걸어와 “혹시 망해서 문 닫으면 LP기계를 달라”고 하더란다.



서울 압구정동엔 사방 벽을 온통 LP로 채운 카페가 성업한다.
이런 곡도 있을지 긴가민가 하면서도 쪽지에 신청곡을 적어 내면 DJ가 신통하게도 찾아내 틀어 준다.
홍창규씨처럼 온 세상을 호령하는 디지털문화에 길들여지기를 굳이 거부하고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삐딱한 아웃사이더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 ‘인간 쇼비니스트(human chauvinist)’들은 아날로그에 깃든 사람의 체온을 사랑하기에 아름답다.


[조선일보 2004.07.27]
(권대열 논설위원 dykwo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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