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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01 10:43
[월드컵 거꾸로 읽기]'히풍'에서 진정 배워야 할 것
 글쓴이 : 네티즌
조회 : 2,408  
한 네덜란드 처녀에 관한 추억
정지환 기자 lowsaejae@dreamwiz.com

▲ 히딩크 감독. ⓒ 연합뉴스
월드컵 본선 출전 48년의 숙원 첫 승, 16강 진출, 8강 진출, 4강 진출….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 거스 히딩크(56·이하 존칭 생략) 감독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던 그 약속을 지켰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그의 '예언'대로, 세계는 히딩크 사단이 신들린 듯이 연거푸 새로 써내고 있는 '월드컵 신화' 앞에 경악하고 있다.

정작 신화를 창조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 역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지난 6월 22일 4강 진출의 길목에서 벌어진 8강전은 한반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승부차기의 막다른 골목까지 간 끝에 '태극전사'가 '무적함대'를 격침시키는 순간, 손에 땀을 쥐고 가슴 졸이던 한국인들은 너나 없이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의 월드컵 기록은 초라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의 전적은 14전4무10패. 특히 첫 출전에서 헝가리에 9대0으로 참패한 것은 역대 월드컵 사상 최고 골차 기록. 아직도 그 신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왔던 '아시아의 맹주' 자리도 최근에는 일본에게 넘겨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48년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거둔 한국의 전적은 현재 5전4승1무. 폴란드전, 미국전, 포르투갈전, 이탈리아전, 스페인전으로 이어진 '각본 없는 드라마'가 상영될 때마다 4700만 국민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열광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마워요, 히딩크."

2002년 6월 히딩크 태풍 즉 '히풍'은 그렇게 한반도에 해일처럼 몰아쳐 왔다. 결국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히풍'의 화두는 "히딩크에게 배우자"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여기서 한 마디만 하고 넘어가자. 축구는 그저 축구일 뿐이며, 따라서 축구는 부담 없이 즐기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에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축구 혹은 월드컵을 통해 어떤 심각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정말이지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히딩크 열풍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잠시 심각한 얘기를 하더라도 용서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히딩크, 혹은 히딩크 현상에서 진정으로 배울 것은 무엇이고 버릴 것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 우리는 월드컵 개막을 앞둔 지난 5월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을 마친 뒤 히딩크가 네덜란드의 최대 신문인 <드 텔레그라프>와 행했던 인터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한 지인이 이메일을 통해 보내준 이 인터뷰 전문을 접한 뒤 히딩크에 대한 필자의 시각은 크게 바뀌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도 같은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한겨레> 6월 7일자 칼럼에서 "히딩크가 단순히 냉정한 승부사가 아니라 무엇보다 지성인이며 또한 고상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이 기사를 접하고 나는 그를 비로소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결론으로 끝맺고 있다.

"우리는 감성적인 민족이다. 먼저 사랑과 신뢰와 인정을 받으면 우리의 신바람은 하늘을 찌른다. 히딩크는 이 사실을 우리보다 더 깊이 알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것이다. 그의 방법을 배우기 전에 그의 감성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의 냉정함을 배우기 전에 그의 사랑과 믿음을 먼저 배워야 한다. 이 점을 간과하는 모든 히딩크 배우기는 허사다."

히딩크 현상에서 얻은 교훈을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추(反芻)와 천착(穿鑿)의 계기로 삼아보자는 그의 발상에 필자는 동감한다. 그렇다. 지금은 히딩크, 혹은 히딩크 현상의 '창(窓)'을 통해서 우리의 '자화상'과 '청사진'을 동시에 그려보고, 열광의 차원을 넘어서 차분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는 시점이 아닐까. 히딩크 현상을 주체적 시각으로 읽어보자는 것이다.

그 동안 히딩크 혹은 히딩크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나왔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무엇보다 먼저 히딩크 현상을 그의 출신 국가인 네덜란드의 창을 통해서 읽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지난 6월 22일 광주 경기장에서 스페인과의 8강전이 시작되기 전 붉은 악마는 애국가가 경기장에 울려퍼질 때 대한민국 국기와 함께 네덜란드 국기를 동시에 펼치는 깜짝 이벤트를 연출했다. 같은 날 네덜란드 대사관은 광화문 네거리에 'GOOD LUCK'(행운을 빕니다)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대형 현수막을 내걸어 화답했다. 인구가 1600만밖에 되지 않는 유럽의 한 작은 나라가 히딩크를 통해 한국인과 온몸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과 네덜란드의 인연은 결코 짧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두 나라가 첫 인연을 맺는 과정을 살펴보면, 나라와 나라의 만남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초 한국에 최초로 표류해 들어와 서구의 문물을 전달하고 귀화까지 했던 벨트브레(한국명 박연), 13년 동안 한국에 머물다 귀국한 뒤 그 유명한 <하멜 표류기>를 씀으로써 서구에 한국을 최초로 알린 하멜도 사실 모두 네덜란드인이다.

1907년 이준 선생이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됐다가 순국한 장소도 바로 네덜란드의 헤이그라는 도시였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약 4백년과 1백년이 흐른 지금 '히딩크 체류기'와 '히딩크 파견기'를 목도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네덜란드는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네덜란드의 한국에 대한 투자 규모는 미국, 일본에 이어 3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네덜란드는 한국의 수출 대상 국가 중 13위이기도 하다.

유럽만 놓고 보면 영국, 독일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2000년 12월부터 한국축구 사령탑으로 인연을 맺은 뒤 주변의 칭찬과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소신과 원칙대로 한국축구에 선진축구를 접목시킨 '히딩크 투자기'와 '히딩크 수입기'를 목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네덜란드는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 우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강대국 사이에 끼여서 약소국의 설움을 톡톡히 맛봤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압박과 설움을 연대와 통합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실제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1946년에 결성한 베네룩스는 최초의 국가연합 사례로 꼽힌다. 유럽통합의 출발점인 마스트리히트조약(1992년)이 체결되는 과정에서도 네덜란드는 커다란 공헌을 했다.

네덜란드가 추구하는 '개방적 외교'도 빼놓을 수 없다. 개발도상국 원조에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네덜란드는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했으며, 1950년 유럽에서 가장 먼저 붉은 중국을 승인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북한과도 정식 수교를 체결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우리에게 좋은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 대륙의 젖줄 중 하나인 라인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라인 삼각주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유로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강력한 해양대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아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네덜란드가 제국주의국가이자 침략국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벨트브레나 하멜의 한국 표류도 바로 그런 침략 과정의 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네덜란드는 17세기부터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해 식민지를 넓혀나갔는데, 최근 인도네시아가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종주국은 바로 네덜란드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제일 먼저 침략한 것도 네덜란드였다. 미국을 상징하는 '양키'라는 말도 사실은 '네덜란드의 아들'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뉴욕의 전신이 바로 뉴암스테르담이었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를 배우되 우리의 시각을 갖고 주체적으로 배워야 하며, 네덜란드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쉽게 감을 잡기 어려운 흥미로운 나라다. 동성애자의 결혼을 보장하고, 연성 마약(마리화나)과 공창제도를 합법화하고,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개성을 지닌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창을 통해 한국의 자화상과 청사진을 그려보기 위해 필자는 2년 전 직접 인터뷰를 했던 한 네덜란드 여성을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디아나(25).

그녀의 시댁은 한국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할 때만 해도 그녀는 미혼의 여대생이었다. 그녀가 한국인 총각 장광렬(32)씨와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7월. 이스라엘 키부츠 중의 한 곳인 예희암에서였다.

이곳은 5백여명의 주민과 외국에서 온 30여 명의 발런티어 청년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키부츠였다. 영국, 미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한국, 일본 등 발런티어 청년들의 국적은 다양했다.

어느 날 디아나가 먼저 아시아 청년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시아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장씨가 '아시아 대표'로 대화 상대가 돼주었다. 장씨는 대학 시절부터 '의식 있는 배낭여행'을 실천에 옮겼던 터라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루 8시간으로 배정된 작업을 끝내면 수영장에 가거나 차를 마시면서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나라에 대해 열심히 소개했다.

어느 주말 기독교인들이 로마군에 맞서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았던 마싸다에 여행을 갔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곧바로 동거에 들어간 두 사람을 위해 키부츠 관리소 측은 캐러밴 한 채를 내 주었다.

키부츠 생활이 끝난 그해 10월 두 사람은 네덜란드로 날아갔다. 장씨는 네덜란드에서 6개월 동안 생활했다. 디아나의 고향인 애먼은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로 네덜란드의 북동쪽에 위치한 드렌츠 주에 속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욥(58)이고, 성은 위렌도르프였다. 16세 때부터 용접공으로 일해온 노동자인 그는 연상의 여인 데이아(61)와 결혼해 외동딸 디아나를 얻었다.

디아나의 부모는 동양에서 온 딸의 애인을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다. 딸보다 키도 작고 피부도 달랐지만 그들은 어떤 선입견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유색인종이면서도 동남아인들을 무시하는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장씨가 이면지를 쓰지 않고 버리면 무섭게 화를 낼만큼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번에는 디아나가 애인의 나라 한국을 공부할 차례였다. 1999년 5월 장씨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고, 비자 발급 절차를 거친 디아나가 한 달 뒤 한국에 왔다.

한국인 애인을 만나기 전까지 디아나에게 한국은 그저 동양의 먼 나라에 불과했다. 그 동안 그녀가 갖고 있던 한국에 대한 인상은 '분단된 나라' '학생들의 도심시위'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 '개고기를 먹는 나라'가 전부였다. 실제로 이번 월드컵 기간에 방한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을 때도 답변 1위를 차지한 것은 '분단국가'였다. 분단의 당사자이자 희생자이면서도 정작 분단 문제에 무감각해진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욕심쟁이인 디아나는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에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마침 네덜란드 대학에서는 반드시 두 가지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그녀는 한국의 대학에서 그것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으로 서울대의 한 교수와 접촉했다. 그리고 그 교수의 연구팀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회신을 받았다.

경기도 부천시 역곡에 위치한 장씨 집에 여장을 푼 디아나의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수압이 낮아 샤워도 맘껏 할 수 없는 악조건이었지만 그녀는 서울대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틈틈이 경주, 광주, 인제, 속초, 지리산, 설악산 등을 여행했다. 애인의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한 공부였다. 광주에 갔을 때는 무등산과 망월동을 찾았다. '광주'에 대해서는 장씨에게 이스라엘에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왔지만 직접 와서 보니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 디아나는 고국으로 돌아간 뒤 월간 <말> 네덜란드 통신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네덜란드판 노사정위원회인 '폴더 모델'과 연성 마약 합법화 문제를 소개한 기사.

그리고 6개월이 흘렀다. 디아나는 2000년 1월 2일 네덜란드로 돌아가며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을 너무 좋아하게 됐어요. 그러나 한국에선 살고 싶지 않아요."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체험 몇 가지를 말해주었다. 필자는 '디아나 체류기'를 소개하는 한편 필요한 경우 '히딩크 체류기'도 곁들일 생각이다. 그들이 관찰하거나 영향을 준 사례의 행간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찾아보자.

(1)지하철 1호선에서 있었던 일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 1호선에는 빈 좌석이 없었다. 디아나는 신림동의 서울대 연구실을 떠나 부천 역곡의 시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행히 자리를 잡아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왔다. 그리 늙어 보이지 않는 노인은 디아나 옆에 앉아 있던 학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지만,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디아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학생은 자리를 그 노인에게 양보했다.

그 노인은 옆자리의 한 30대 남자에게 뭔가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자리를 양보했던 학생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곧바로 자리를 비켜주지 않은 그 학생에 대해 험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다툼을 하는지,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제는 그 30대 남자마저 자리를 떴다. 그 노인은 혼자서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인지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디아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전철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큰소리를 지르는 그 노인의 몰상식함 때문에 점점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그 노인이 소리 지르는 것을 막지 않았다. 디아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아무도 이 노인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마침내 디아나는 그 노인을 향해 외쳤다.

"Hey, old man. Shut up!"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디아나에게 쏟아졌다. 뜻밖에 외국인 여자에게 일격을 당한 그 노인은 곧 머쓱해져서 디아나에게 "sorry, sorry"를 연발했다. 누구나 공중도덕은 지켜야 하며, 설사 노인이 할지라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디아나가 가지고 있던 상식이었다.

사실 이러한 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눈에 박힌 티끌은 잘도 보면서 정작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위선적 도덕주의. 우리는 그것을 한국언론, 그 중에서도 족벌언론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실제로 이번에 족벌언론은 연고주의를 극복하고 선수를 선발한 히딩크를 칭송하면서 정치권의 정실인사와 편파인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그 지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패밀리'가 지배하는 족벌언론도 연고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도리어 그 정도가 정계나 재계보다 더 심각하다.

1920년 창간 이후 1998년 정권교체 때까지 35명의 편집국장 중 호남 출신이 단 한 명도 없었던 <조선일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호남정권 출범 이후 거의 80년만에 최초의 호남 출신 편집국장이 들어서긴 했지만 말이다.

더욱이 지하철 1호선의 그 노인은 그나마 자신의 잘못을 금방 시인했지만 <조선일보>는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일제시대엔 일본 천왕에게 충성하고, 독재시대엔 최고 권력자에게 굴종하고, 분단시대엔 통일운동의 발목을 잡았던 신문이 한마디 사과도 없이 아직도 다수의 독자로부터 1등가는 신문으로 대접받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잘못을 보고도 침묵하는 승객이 타고 있던 지하철 1호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2)서울대 대학원 실험실 풍경

디아나에게 한국의 대학원 실험실 생활은 아주 낯설었다. 많은 것들이 네덜란드와 달랐다. 우선 네덜란드에서는 주 5일간만 일한다. 주중에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하고 대다수가 6시경 실험실을 떠난다. 이에 비해 한국 생활은 훨씬 고달프다. 대다수가 주 6일간, 오전 9시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심지어 밤 12시를 넘기기 예사이고, 때로는 밤을 새워 일하기도 한다. 디아나는 처음에는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자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가끔 같이 일하는 학생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이 경우 십중팔구는 부족한 잠을 보충하러 빈방을 찾아 간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런 고된 실험실 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 학생들은 한 식구처럼 지냈다. 디아나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네달란드 대학의 실험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어떤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 네덜란드에서 실험실 학생들은 서로를 단지 학교 친구만으로 여길 뿐이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위로해 주는 한국의 학생들처럼 정이 없다. 디아나는 이런 것은 네덜란드가 한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디아나의 눈에 비친 한국 대학의 '고달프나 비효율적인' 모습은 히딩크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연상케 한다. 그는 2001년 1월 울산에서 훈련 도중 "한국 선수들은 마치 시종 4000∼5000rpm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가 계속 같은 속도로만 갈 수는 없다. 패스할 때도 리듬과 템포를 살려 강할 땐 강하게, 약할 땐 약하게 차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드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지시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다. 유럽의 톱 클래스 선수들은 스스로의 생각이 강하고 개성이 탁월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프로라는 의식이 있을 뿐 하나의 팀으로서, 아니 한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 선수로서의 사명감은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월드컵이란 무대를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선수들도 많이 봐 왔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월드컵 그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무대에서 뛰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왔다. 이러한 한국 선수들의 마음가짐에 충격을 받았다."

히딩크와 디아나의 지적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모순돼 보이는 발언 속에 어쩌면 양면성을 가진 우리의 진짜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그들의 지적 중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일 것이다.

(3)어느 서울대 교수와의 논쟁

그런데 한번은 디아나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바쁘게 실험해야 할 학생들이 결혼식 초대장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자기 아들 결혼식 초대장 보내는 일을 담당 교수가 학생들에게 시킨 것이었다. 왜 그 교수는 실험에 바쁜 학생들에게 개인적인 일을 시키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학생들은 자신들의 실험을 제쳐두고 교수의 사적인 일을 실험시간에 돕고 있는 것일까? 네덜란드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디아나는 다음날 그 교수에게 따져 물었다.

"교수님은 실험시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죠."
"그렇다면 왜 중요한 실험시간에 당신의 사적인 일을 학생들에게 시키십니까?"
"그것은…, 한국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그 교수는 디아나의 당돌한 질문을 받고 처음에는 그런 것은 한국에서 예사로운 일이며, 각 나라에는 다른 나라가 이해할 수 없는 관습이 있다고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교수는 결국 멋쩍게 웃고 말았다.

우리는 디아나가 토로한 체험에서, '젊은 선수'에게 감독과 선배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말고 따질 건 따지고 경기 중에도 선후배 구별 없이 큰 소리로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라고 주문한 히딩크의 지도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히딩크에게 배우자"는 명제의 제일 첫 자리에 올린 것은 바로 권위주의 극복이었다. 결국 히딩크는 한국팀을 지배하고 있던 기존의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생산적 네트워크를 방해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부장적 위계질서는 사실 체육 분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장 창조적이고 감성적이어야 할 예·체능 분야는 물론이고 가장 이성적이고 지성적이어야 할 의료, 법조 분야 등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도리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체육선수들과 지식인들은 왜 그런 권위주의에 맞서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연고주의라는 철옹성 같은 시스템에 의해서 굴러가고 있는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국가대표 선발과정에 연대파, 고대파 등 특정 인맥의 입김과 영향이 컸다는 지적이 많았으며, 정·관계와 학계마저 지연과 학연에 의한 정실인사와 편파인사에 찌들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히딩크는 학연과 지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선수를 기용했다. 그는 훈련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맡은 임무를 소화해내지 못하면 설사 그가 '스타 선수'라고 할지라도 출전 기회를 박탈했다. 가차없는 탈락과 발탁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수들의 신뢰를 얻은 이유는 결국 '인맥'이나 '명성'보다 '실력'과 '성실'을 선수 발탁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4)대한민국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상

디아나에게 한국은 '반면교사'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한국에선 여지없이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에서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도 결코 그저 주어진 것은 아니었겠구나.' 그녀가 한국에 와서 새롭게 얻은 깨달음이었다.

디아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조카의 탄생을 지켜봤다. 애인의 여동생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런데 애인의 어머니, 즉 예비 시어머니는 딸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서 숙식하면서 딸을 돌봐야 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일부 중환자를 제외하고는 가족들의 환자 면회가 일정한 시간에만 허용된다. 한국에서처럼 가족들이 곁에서 간호원 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녀의 상식이 무너진 사례다.

네덜란드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의료·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나라다. 디아나는 장애인들도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얻고, 일할 수 없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국가로부터 생계비를 지원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삼촌과 숙모도 정부에서 지원하는 장애인 고용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지하철 안이나 역 계단에서 항상 구걸하는 한국의 장애인들을 보면서, 네덜란드 정부의 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그들에 대한 사회의 배려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장애인만이 아니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주 5일간, 하루 8시간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 모든 것이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디아나는 네덜란드 노동자들이 지금처럼 가족과 함께 충분한 여가를 보내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노동조합의 힘겨운 노력과 투쟁을 통해 얻어낸 성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네덜란드는 노사정(노동자, 사용자, 정부)의 나라이다. 국왕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노사정의 합의와 협력에 의해 국가의 주요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 의해 새로운 대안으로 평가받은 바 있는 네덜란드판 노사정위원회인 '폴더 모델'은 지금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폴더는 해안 간척지를 말하는데, '폴더 모델'은 국토의 절반이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인 네덜란드가 자연과 싸우는 동시에 자연과 조화하듯이, 노사정이 경쟁과 조화를 통해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시스템이다.


▲ 투옥된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빔 콕 네덜란드 총리. 노동운동 지도자인 두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이 한국과 네덜란드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에서는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대표하는 노조운동 지도자가 총리를 맡는 경우가 많다. 현재 네덜란드를 이끌고 있는 빔 콕 총리도 노조운동 지도자 출신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일 월드컵 기간 동안 한국의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감옥에 갇혀 있는 노동운동 지도자를 망각하거나 방관한 채 "히딩크에게 배우자"고 외치는 것은 순전히 사기라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철저한 배려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역사적 배경도 작용했다. 우선 네덜란드는 수세기에 걸쳐 종교적 피압박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준 관용의 나라이다. 스페인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온 신교도, 프랑스에서 쫓겨온 위그노 교도들, 16∼17세기경의 유태인들이 마지막 피난처로 삼았던 것이 바로 네덜란드였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감성과 사랑을 간과한 모든 히딩크 배우기는 허사다"라고 언급했지만,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히딩크 열풍의 주류는 그와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히딩크식 경영기법' 운운하면서 10만여 명을 해고시킨 GE의 잭 웰치 회장과 히딩크를 비교하는 일부 식자층이 그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결국 히딩크 열풍을 또 하나의 성공법이나 처세술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선진국엔 철저한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어 있으니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우리와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한 우리에게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자본의 시각에서 히딩크 열풍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의 주체적이고 현실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5)감옥에서 풀려난 청년과의 만남

한번은 디아나가 남편의 친구를 만나게 됐다. 학생운동가인 그는 국제사회주의자(IS)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돼 1년 넘게 수감됐다가 1999년 8·15특사로 풀려 나왔다고 했다. 그에게 감옥에 갇혔던 이유를 묻자 사회주의 조직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게 감옥에 갇혔던 이유라고요?"

디아나는 깜짝 놀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네덜란드에서도 근래에 신나치주의 극우정당이 출현해 외국인을 증오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당에 가입한 당원이라도 직접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 당에서 활동한다는 이유만으로 구속할 수는 없다. 미국과 소련이 대립했던 냉전시대에도 공산당에 가입해서 활동한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일은 없었다.

누구나 정치와 사상의 자유를 저절로 보장받고 있다는 그녀의 생각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오랜 기간 동안 싸웠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한국에 머물면서 조국에 대한 디아나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이밖에도 디아나가 한국에서 이상하게 느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디아나가 아침마다 학교에 갈 때 접하게 되는 풍경도 그 중 하나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가는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단발머리를 하고, 획일적인 교복에,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왜 한국에서는 여학생들에게 보기 싫은 단발머리와 교복과 흰색 운동화를 강요하는 것일까? 왜 가장 예뻐 보이고 싶은 나이인 그들에게 화장도 못하게 하는 것일까? 자신이 원한다면 짙은 화장에 맘껏 멋을 부릴 수 있는 네덜란드의 여학생들과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이와 관련,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일대 공방전을 불러일으켰던 국가대표 축구선수 군복무 면제 논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소 아쉬웠던 것은 이것이 군복무 면제냐 아니냐는 찬반 논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징병제 폐지와 모병제 실시 같은 본질적 문제를 따져보는 논쟁으로 승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일까.

물론 일부에선 아직도 전체주의나 획일주의 등의 군사문화를 비판하거나 징병제 폐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한국은 분단의 특수성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렇다면 분단에서 비롯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화해아 협력의 노력을 더 기울이거나 분단과 대립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킴으로써 대결과 전쟁의 위기를 해소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것이 해결된다면 군복무 면제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로 흐른다. 일부 보수적인 언론과 정객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주적 논쟁, 6.15합의 2항 논쟁 등이 바로 그것이다. 분단의 해소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그들의 문제 제기가 다분히 불순한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정작 병역 면제율은 더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위관료와 족벌사주의 병역면제는 일반인의 각각 2.5배와 10배에 이른다.

디아나.

그녀는 지난해 한국에 들어와서 전통 혼례 방식으로 결혼식을 치름으로써 한국의 며느리가 됐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한국은 좋아하지만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은 나이, 성별, 지위에 관계없이 동등하다는 것이 내가 네덜란드에서 체득한 가치관이었어요. 그러나 한국인은 나이, 성별, 지위에 따라 위아래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인의 의식에 강하게 남아 있는 차별의식은 바로 뿌리 깊은 가부장적 위계질서에서 온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위계질서를 이용해 특권을 지속하고 누리려는 기득권자들 때문에 그 차별의식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한국 사회는 IMF 이후 '더불어 사는 삶'보다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 더 강조되고 있다. 그 와중에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는 더욱 무시되고 있다. 그러한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하멜의 후손들'에게 한국은 '좋아하지만 살고 싶지는 않은 나라'로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드는 한 가지 궁금증.

히딩크와 함께 한국인들이 이룬 월드컵 신화를 지켜본 디아나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장광렬-디아나 씨. 네덜란드에서 이 글을 봤다면 답장 좀 주시죠.

2002/06/24 오후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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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전문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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